공설시장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갑자상회

80번째 이야기 / 2022.01.19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지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도심지 역할을 한 곳을 지칭하는 ‘원도심.’ 하지만 도시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오랜 역사와 많은 이들의 추억을 간직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원도심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천안 원도심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천안에서 가장 붐볐다는 명동거리도, 수많은 인파 때문에 밀려다녀야 했다는 지하도상가와 역전시장도 지금은 한산하기만 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까지 계속되면서 힘겹게 버티던 가게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고, 곳곳에 빈 공간이 생겨났다. 원도심의 역사를 함께한 오랜 가게들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60년 동안 2대째 역전시장(구 공설시장) 안 자리를 지켜온 곳이 있다. 바로 각종 식료품 및 공산품을 판매하는 <갑자상회>다. 60년의 긴 세월 동안 역전시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상규 대표님을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갑자상회

공설시장 역사의 산증인

<갑자상회>의 시작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상규 대표님의 부모님이 처음 시작한 곳으로, 아버지의 성함을 따 가게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이런 가게도 없었어요. 이 일대가 야산이었는데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된 거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천막 대신 저희 아버지가 직접 수수깡을 엮고 황토 흙을 발라서 벽을 만들고 장사를 했어요. 그 당시는 간판은커녕 그냥 쌀집, 떡집, 야채집, 이런 식으로 부르던 때라 가게 이름도 없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하루는 소풍을 다녀왔는데 ‘갑자상회’라는 간판이 걸려있더군요. 형이 만들었다는데, 그것도 이 시장에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간판이 생긴 거였어요.”

당시 그곳에 모인 상인들 모두가 그러했듯 대표님의 부모님도 갖은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여기 옛날엔 ‘권병원’이라고 크게 있었어요. 엄청 크게 잘 되던 병원이었는데,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천안시의 소유인 이 시장터를 전부 매입하려고 하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고 상인들이 모두 모여 시위를 했었죠. 한 3~4개월 정도 장기간 시위가 지속되니까 시에서 우리에게 매매권을 우선으로 주겠다고 했어요. 지금 떡볶이집 자리가 그때는 과일 도매 경매장이었는데 거기서 상인들이 밤늦게까지 모여 수십 일 동안 회의를 했던 것이 생각나요. 그렇게 모두 힘을 합친 덕에 지금의 시장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었죠. 그때는 상인들끼리 사이도 좋고, 정도 많았어요.”

잠시 옛날 일을 회상하며 미소를 짓던 대표님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시절엔 보릿고개라는 말이 익숙했어요. 아침, 저녁을 굶고 점심 한 끼만 먹고 일을 하거나, 배고픔을 찐 감자 두세 알로 버텨야 하는 날도 많았어요. 수도도 공동수도라 마음대로 물을 쓰거나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자랐죠.” 워낙 살림살이가 다들 힘들었던 때라 대학을 가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대표님은 일찌감치 돈을 벌기 위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주산 3단과 부기 2급 자격증을 땄다. 경리로 취직이 쉬운 때였기에 3학년 2학기에 올라가자마자 한 회사에 경리 실습을 다니기도 했지만, 몇 개월 후 영장이 나와 곧바로 군대에 들어갔다.

갑자상회

이상규 대표님이 부모님을 도와 본격적으로 <갑자상회> 일을 시작한 것은 제대 후부터였다. 당시 가게 주변의 식당에 납품도 많이 하고 장사도 잘 되어서 여동생과 누님이 돕고 있었음에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제대 신고 후 집에 오자마자 군복 차림으로 배달과 수금을 다녔어야 할 정도였다고. 그렇게 시작한 일이 가업을 잇는 일이 됐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 함께 일을 하게 됐다

부부의 버팀목이 되어준 아이들


82년도에 이상규 대표님이 가게를 온전히 도맡았을 때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신 IMF 이전까지만 해도 명절 때나 여름 휴가철만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밤 12시까지 장사를 해야 했다. 비록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벌이는 좋았기에 즐거웠다고. “식료품 가게 중에서는 우리가 제일 오래됐고 부모님이 하실 때는 생선까지 팔 정도로 품목이 다양했어요. 그때는 물건을 가져다 놓으면 다 돈이었고, 하나만 팔아도 남는 게 있을 때였으니 힘들어도 흥은 났죠. 그때는 은행 이자도 높을 때여서 번 돈의 2/3는 저금하고, 남은 돈으로 부모님과 밥 한 끼 사 먹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금슬 좋은 부부는 삼 남매를 낳으면서 더 열심히 일했다. 버는 족족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데 다 썼지만 그게 유일한 낙이었고, 힘이 됐다. “세 아이 모두 4년제 대학을 보냈고, 큰딸아이는 공부를 잘해서 미국 교환학생까지 보냈어요. 아이들 교육비로 통장에 돈이 남아있는 날이 없었지만, 애들이 잘 따라와 주니까 오히려 힘이 나더라고요. 누군가가 애들한테 돈 줄 생각하지 말고 가르치는 데 쓰라고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아이들이 공부해야 할 때 이렇게 돈을 벌 수 있던 것이 정말 다행일 따름입니다.”

<갑자상회>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이상규 대표님 부부가 30년 넘도록 매일같이 지켜온 일상이다. “저는 3시 반에 일어나 새벽시장에서 물건을 해오고, 안식구는 4시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청소와 정리를 시작합니다. 다른 가게들이 오픈하기 전 납품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시간을 지키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어요. 물론 힘든 일이긴 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죠. 사실 젊을 때는 아파도 그냥 견딜 수 있었어요. 몸살이 나도 몸살감기약 하나 먹으면 뚝 떨어지고,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잠시 쉬면 금세 좋아졌으니까요. 그런데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는 회복도 잘 안 되고 여기 저기 안 아픈 곳이 없는 게 속상하네요. 운동할 겨를도 없었던 터라 요즘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라도 틈틈이 스트레칭도 하고 밴드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대표님은 가족과 함께였기에 모든 힘든 일을 견딜 수 있었다고 전했다. “안사람이 그동안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 시장에 지붕이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그전까지는 한겨울에도 시도 때도 없이 가게 앞에 쌓이는 눈을 치웠어야 했거든요. 겨울옷도 마땅치 않던 때라 안식구가 두 볼에 동상이 걸려서 지금까지도 치료를 받으며 고생을 해요. 그게 너무 안쓰럽고 미안하죠. 결혼 후 지금까지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저를 묵묵히 따라와 주고 지지해 주는 것도 고맙고요.”

갑자상회

“인생에는 세 번의 고비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첫 번째 고비는 IMF 때였고, 두 번째는 아이들 학비를 충당하기가 힘들던 때였죠. 마지막 세 번째 고비는 2010년쯤인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거래처가 다 떨어져 나간 때가 있었어요. 그전에는 신부동이며 남산, 아산역까지 납품하는 곳이 정말 많았는데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하나 둘 거래를 끊더라고요. 상상 이상으로 매출이 많이 떨어지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이후 더 열심히 뛰면서 조금 회복되기는 했지만, 문을 닫는 식당도 점점 많아지면서 힘든 상태로 지금까지 온 것 같네요. 그나마 아이들 교육도 이제 다 끝났고 각자 밥벌이도 하고 있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그렇게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대표님 부부는 아이들에게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다. “아이들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신기하다고 해요. 직접 돈을 벌어보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겠는데 어떻게 엄마 아빠는 장사 얘기를 한 번도 안 하냐고요. 그런데 우리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까지 전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건 엄마 아빠인 우리 일이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요. 물론 스트레스가 많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아들딸을 만나 맛있는 음식과 술 한 잔에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든 것도, 스트레스도 다 풀립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엄마 아빠 좋아하는 연예인 콘서트 티켓도 끊어주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을 보면서 이런 맛에 사는 건가 싶어요.” 인터뷰 내내 자식 자랑 일색인 부부였다.

갑자상회
갑자상회

오직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게를 꾸려온 이상규 대표님 부부. 욕심부리지 않고 매일을 앞만 보며 부지런히 달려온 세월이 벌써 30년을 훌쩍 넘었다. 이제 가게의 장점은 오랜 시간 한결같이 이 자리를 지켰다는 것뿐이라는 대표님은 역전시장이 남아있는 한 끝까지 그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다고 밝혔다.

“역사와 전통을 지닌 이곳에 재개발 바람이 불어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것이 안타깝지만, 큰 욕심은 없어요.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게 해준 이 가게를 최대한 지키고, 안사람과 건강하게 남은 생을 보내는 것 밖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요.”

비록 예전의 명성을 잃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지만 서로를 다독이며 힘든 순간도 꿋꿋하게 버텨온 부부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연다. 두 사람의 이런 성실함과 올곧은 마음을 담은 <갑자상회>의 불빛이 더욱 오랫동안 원도심을 밝혀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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