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역 지하도상가의
비타민 같은
캐주얼 의류 전문점,
빈티지

97번째 이야기 / 2022.05.18

천안역 지하도상가의 중심부를 지날 때면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지나는 행인이 적어 부쩍 적막하게 느껴지는 지하도 안을 유쾌하게 채워주는 흥겨운 대화와 웃음의 가운데엔 캐주얼 의류 전문점 <빈티지> 송인희 대표님이 있다.

매사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보낸다는 대표님은 언제나 주변 매장의 대표님들을 웃게 만들고 지하도상가를 더욱 밝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다.

5월의 어느 날, 지하도상가 265호 <빈티지>에서 만난 그녀와 그 어느 때보다 유쾌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빈티지

인심 후한 지하도상가

인터뷰를 위해 처음 본 기자를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준 송인희 대표님은 매장 가장 안쪽의 아늑한 자리를 내어주셨다. 의외로 쌀쌀했던 날씨 탓에 오들오들 떨다 상가로 내려갔는데 온몸이 순식간에 녹을 정도로 자리가 뜨끈하다. 여자는 자고로 몸이 따뜻해야 한다며 잠시만이라도 전기장판에 몸을 녹이라고 엄마처럼 다정하게 챙겨주셨다.

그러고는 곧바로 옷을 사러 온 친한 동생과 식사를 하기 위해 밥을 시켰으니 같이 한술 뜨고 인터뷰를 하자고 권하셨다. 생각지 못한 점심 대접까지 받으며 배불리 먹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넉넉한 인심과 따뜻한 말로 서로 온정을 나누는 지하도상가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옷 가게를 하기 전에는 선거 캠프와 같은 캠프 생활을 오래 해왔다는 송인희 대표님은 여성 위원들 관리 업무를 주로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명령하는 투로 말을 하게 되고 성격도 바뀌어 갔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에선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이거 할래?’가 아닌 ‘이거 해라!’라고 지시를 해야 하는 위치였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제 말투나 성격도 자꾸 세지고 안 좋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고쳐졌죠.”

빈티지

차츰 손이 빠르고 일도 잘하는 예쁜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랜 캠프 생활을 접고 쌍용동에서 골프웨어 전문점을 하는 지인의 가게를 자주 방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옷을 판매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늦은 나이에 다른 일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옷 가게는 경력은 없어도 나만 열심히 하면 될 수 있겠다 싶어 <빈티지>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막상 해보니 재밌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특히 이웃 매장의 대표님들과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이곳에 나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상으로 느껴졌다고.

첫 가게를 지하도상가에서 시작한 것 역시 대표님의 선택이었다. “지하도상가가 참 편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해가 들지 않는 지하이긴 하지만 관리를 정말 잘 해주잖아요.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고, 더울 때는 시원하게 해주고요. 모든 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라 동네 기분도 나죠. 지상에선 이렇게 가게들끼리 서로 왕래하고 매장도 대신 봐주고, 친하게 지내기 쉽지 않잖아요. 지하도상가니까 가능한 일이죠. 앞집, 옆집 모여 날마다 티타임도 가지고 오손도손 얘기도 나누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너무 좋아요.”

빈티지
빈티지

음악과 함께하는 힐링의 공간

<빈티지> 매장 안에는 유독 악기가 많이 보인다. 기타와 바이올린, 우쿨렐레, 심지어 하모니카까지 있다. 음악을 좋아하시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표님은 자신 있게 얘기를 꺼냈다. “엄청 좋아하죠! 기타도 치고, 하모니카도 하고, 색소폰도 불고 다 해요. 통기타는 처녀 때부터 시작해서 꽤 오래, 열심히 쳤어요. 성음이나 세고비아 기타가 나오던 시절, 겨울에 눈이 내리면 크리스마스 캐롤이 전파사에서 울려 퍼지던 그 시절요. 그러다 결혼하고 잠시 음악을 잊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까 적적한 마음도 들고, 그동안 뭐 하며 살았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예전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나만의 힐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악기를 들었죠.”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은 대표님에게 큰 힘이 되었고,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고 한다. “동호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고 ‘동행’이라는 팀을 만들어 양로원이나 경로당 같은 곳에 방문해 연주하기도 해요. 가끔 공연 섭외도 들어오고요. 지하도상가에서 행사가 열릴 때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연주하곤 해요.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손을 혹사했더니 퇴행성관절염이 와서 요즘은 되도록 기타 연주를 줄이고 색소폰을 시작했어요. 색소폰은 시작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행히 워낙 음악을 좋아하고 악보도 잘 보다 보니 금방 금방 늘더라고요. 저는 음악을 제 노후의 놀잇감으로 생각해요. 우리 주변에서 어르신들이 공원에 그냥 쓸쓸히 앉아계시거나 경로당에서 고스톱 등을 치며 시간을 보내시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머지않아 내 모습이겠다 싶더라고요. 전 뭔가 노년을 무료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악기를 꾸준히 다루려고요. 요즘은 손님이 뜸한 이 매장에서 혼자 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이곳이 작은 음악회 공간이자 나를 위로해 주는 힐링 공간이 되었네요.”

음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젊은 스타일, 독특한 스타일, 남과 다른 개성 있는 스타일을 많이 찾게 됐고 그것이 <빈티지>라는 캐주얼 의류 전문점을 차리게 된 계기가 됐다.

요리

가게 이름의 ‘빈티지’는 낡고 오래된 듯하면서도 멋지고 고풍스러운 ‘빈티지 패션’의 옷을 메인으로 선보이고 있어서 붙인 이름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빈티지=구제’라는 인식이 강해 가끔 입던 옷인지를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제가 음악을 하다 보니 어딘가 하나씩 개성이 있으면서도 특색 있는 옷을 찾게 되더라고요. 점잖은 옷이 아니라서 보다 젊어 보이는 효과도 있고요. ‘빈티지(Vintage)’라는 것이 꼭 누가 입었던 옷, 오래된 옷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느낌이 나도록 워싱을 가미하거나 패치를 추가하거나 스크래치, 데미징 등의 효과를 낸 패션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분명 저처럼 이런 패션을 좋아하는 분들이 계실 거란 생각에 가게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데, 많은 분들이 구제로 착각을 하시더라고요. 그럴 땐 많이 속상하죠. 여기에 있는 옷들은 전부 새 옷이니까요. 상호를 바꿔야 하나 고민도 되네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디자인의 옷들을 직접 선별해서 가져다 놓은 덕에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한번 마음에 든 옷을 찾은 손님들은 단골이 되어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고.

매장 곳곳에 숨어있는 귀여운 손뜨개 인형도 이곳의 매력 포인트가 되어주는데, 이 인형들 역시 솜씨 좋은 대표님의 작품이다. 뜨개질, 지점토, 매듭 등 손으로 만드는 것은 다 좋아한다는 그녀는 특히 아이들 옷을 다 짜 입혀 키웠을 정도로 뜨개질을 좋아했다고. 하지만 손가락이 아픈 이후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됐다며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요리

정이 많은 대표님은 단골손님과도 쉽게 친구가 되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어려운 일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평소 엄마 생각을 끔찍이 하는 딸이 보내온 핫팩을 이웃에게 나눠주고, 방문판매로 애터미 제품을 판매하는 딸 친구를 위해서는 물건을 진열해둘 수 있게 매장 한 편을 내어주고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이런 마음씨 덕분인지 전라도로 이사를 간 동갑내기 단골손님이 천안까지 직접 찾아와 옷을 사 가기도 하고 지하도상가의 경비원도 친누나처럼 잘 따른다. 주변 매장의 대표님들과도 친자매처럼 허물없이 지낸다.

진심을 다하는 초보 장사꾼

가게를 시작한 지 이제 6년, 적잖은 나이에 장사를 시작해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서투르다는 송인희 대표님은, 대신 누구보다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판매한다고 강조한다. “솔직히 전 장사를 잘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이곳에 오시는 손님들께 정말 성심성의를 다하고, 진솔하고 정직하게 판매한다고 자부해요. 전 여기서 제 일당 정도만 나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많이 남기지 않아요. 세일 상품의 경우는 특히 원가만 받거나 원가보다 싸게 판매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가끔 무조건 ‘비싸다’고 하는 손님이 오시면 많이 속상하죠.”

그래도 가게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그들이 있기에 더 힘을 내서 열심히 일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특히 고객이 이곳에서 사간 옷을 입고 다시 찾아와주었을 땐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하고 행복하다고.

요리

앞으로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다는 그녀는 큰 욕심 없이 지하도상가에 사람만 많아지면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사실 저는 이곳의 상권이 이미 침체되어 있을 때 알고 들어왔기에 크게 스트레스는 없어요. 물론 장사가 너무 안 되긴 하지만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든 상황이기에 크게 욕심부리고 싶지도 않고요. 어디 아픈 곳 없이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다만 지하도상가에 방문객들이 조금만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더 신나서 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2% 부족하게 사는 것이 즐거운 거래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반 푼수로 살아요. 그게 젊게 사는 비결이자 매일을 즐겁게 지내는 방법이에요!”

오늘도 천안역 지하도상가 안 <빈티지>에서는 웃음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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